우리야의 여자(마1:6)

2022. 3. 27. 01:54성경이야기

Δαυὶδ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Σολομῶνα ἐκ τῆς τοῦ Οὐρίου

다윗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 새번역)

 

헬라어 기초과정을 충실하게 배운 사람들이라면 저 위에 있는 헬라어 문장에 "아내"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성경은 저 문장을 "우리야의 아내"라고 번역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문자적인 번역을 추구하는 극히 일부의 성경은 "우리야의 여자"라고 번역한다. 

 

Literal Standard Version
And David the king begot Solomon, of her [who had been] Uriah’s,

Young's Literal Translation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who had been Uriah's,

Smith's Literal Translation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of Urias.

 

이게 그냥 우연일까?

그런데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특별하다. 내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마태가 "아내"를 가리키는 문장에서 정관사 τῆς를 사용한 것은 1:6절이 유일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도 그런 사례가 없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도 정관사를 사용해서 "아내"를 가리키는 경우가 보이지 않고,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에도 그런 사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사례를 다 조사하고 확인한 게 아니라서 혹시라고 그런 사례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상당히 많은 본문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사례는 찾지 못했다.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마태복음 1:6절의 사례는 특별하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여기에서 "아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사실 마태는 모두 23차례에 걸쳐서 "아내"(γυνή)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저 단어가 어려운 단어도 아니고, 아주 흔하게 사용하는 일상적인 단어이고, 마태가 저 단어를 특별히 기피한다는 흔적도 없다. 그런데 유독 1:6절에서만 저 단어를 기피하고, 정관사 τῆς로 대체한다. 왜 그랬을까?

 

마태는 우리야의 아내의 이름, 밧세바를 알고 있었다. 족보에 나오는 다른 여인들처럼 그냥 밧세바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우리야의 그녀"라고 기록했다. 마태는 밧세바의 이름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신 그녀의 남편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록했다. 이건 분명 다윗이 저지른 행위가 옳지 않았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평범하게 "우리야의 아내"라고 쓰지 않고, "우리야의 여자"라고 했을까?

이건 마태가 밧세바의 이름을 지운 행위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마태는 밧세바에게서 "아내"의 지위마저 지워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가 보기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저지른 행위는 다윗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밧세바와 함께 저지른 잘못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은 실수가 아니라,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의 자격을 상실할 만큼 크고 중대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마태는 생각보다 엄정하게 사건을 보고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속에서 이 표현이 그저 단순히 밧세바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 것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족보에 나오는 다른 여인들의 경우와 비교해서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찬찬히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만한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성경 번역자들이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우리야의 아내"라는 번역은 재고되어야 한다.

 

사족) 저 위에 예로 든 문자적인 번역을 한 세 권의 성경 중에 Smith's Literal Translation은 Julia Evelina Smith Parker라는 여성분이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1847년부터 1855년까지(56세에서 64세까지) 8년에 걸쳐서 혼자 성경 전체를 번역하신 것이다. 여성이 혼자 성경 전권을 번역한 것은 지금까지도 저 번역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