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17. 20:41ㆍ성경이야기
τῷ γὰρ ἔχοντι παντὶ δοθήσεται καὶ περισσευθήσεται, τοῦ δὲ μὴ ἔχοντος καὶ ὃ ἔχει ἀρθήσεται ἀπʼ αὐτοῦ.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달란트 비유의 끝부분에 있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있는 자"는 무엇을 갖고 있는 자이고, "없는 자"는 무엇이 없는 자일까?
비유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있는 자이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없이다.
그럼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무엇이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무엇이 없었을까?
또 비유 속에서 그 답을 찾자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남긴 것이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남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왜 생겼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더 앞쪽으로 가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도 "재능"이 있었다. 이것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δύναμιν, 즉 능력이라고 말한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따라(κατὰ τὴν ἰδίαν δύναμιν), 능력과 자질에 맞게 주인의 소유를 맡겼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재능"이 있었다. 한 달란트를 활용할 재능이 있었다. 주인이 보았던 재능은 보관하고 땅에 묻어둘 재능이 아니었다. 그 재능은 다른 종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나름의 결과를 이끌어낼 재능이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는 것이다. 종에게는 주인의 신뢰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 두 종은 일을 했다. 그것을 헬라어로 ἐργάζομαι라고 표현했다. 뭔가 행동을 한 것이다. 이 행동은 주인의 신뢰에 부응한 행동이었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이 종들은 알고 있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담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ἐργάζομαι가 없었다. 노동이 없었다. 땀 흘림이 없었고, 수고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주인의 성품이 두려웠노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이 맡긴 것을 땅에 묻어두었다가, 이제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주인을 아주 경외하는, 그래서 주인에게 조금의 손해라도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신중한 종의 말처럼 들린다. 어쨌든 주인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았으니, 칭찬은 못들어도 꾸중은 듣지 않을 정도는 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주인은 이 종의 논리의 헛점을 단박에 간파해버린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왜 그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벌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아마 이때 그 종은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주인의 이 말을 두고, 주인이 성경에서 금하는 이자놀이를 입에 올린다고 비판하는데, 그건 지나친 생각이다. 지금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거짓 논리를 훼파하는 중이다.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주인은 이 종의 거짓 논리를 무너뜨리고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지칭한다. 마태는 누가복음에는 없는 "게으르다"는 말을 사용한다. 마태에게 착한 종은 곧 충성된 종이고, 악한 종은 게으른 종인 것이다.
게으르다는 뜻의 ὀκνηρός는 겁내고, 우물쭈물 거리고, 뒤로 물러서고, 주저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이 종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주인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아니다. 주인이 간파했듯이 이 종은 진심으로 주인을 두려워한 게 아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하기를 두려워한 것이다.
열심히 부지런히 땀흘려 일하는 것, 실패하든 성공하든 주인이 맡긴 일에 충성을 하는 것, 신실하게 맡은 일에 헌신하는 것, 그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런 충성은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하고, 이겨내야 하는 일인데, 그게 싫었던 것이다. 이 종은 그저 안전하게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달란트도 안전하게 땅 속에 묻고, 조용히.
29절에서 말하는 "있는 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 즉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냐는 생각과 관련해서 공동번역 성경은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공동번역은 우리말 성경 중에 거의 유일하게 헬라어 παντὶ를 포함해서 번역한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누구든지"라는 말을 넣어서 본문을 읽어보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은 우승한 자, 가장 탁월한 자가 아니라, 충성한 자, 수고한 자, 땀 흘린 자, 주인의 신뢰를 받은 자라는 의미가 보인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대표로 칭찬을 받았고, 한 달란트를 더 받았지만, 여기에 적용할 것은 산술적인 이해가 아니라, 상징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가 앞뒤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결정적이다.
달란트 비유 앞에는 열처녀 비유가 있고, 뒤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다. 열처녀 비유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누가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혹은 예수님의 제자에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세 비유는 서로 내용과 주제가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는 달란트 비유를 넘어서 열처녀 비유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두려워한 것, 그에게 없던 것은 무엇일까?
열처녀 비유를 통해 보자면 그는 신부로 초청은 받았으나 혼인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신랑을 맞을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이고,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보자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줄 알고 있었지만, 전혀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자인 것이다. 절묘하게도 열처녀 비유는 게으른 종을, 양과 염소의 비유는 악한 종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 세 비유는 우연히 서로 엮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확대해서 해석해보자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갇힌 자를 돌아보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한 자들인 것이다. 자기가 받은 역량대로, 힘 닿는대로, 열심히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긴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마따나 이들은 착한 자들이고, 신실한 자들인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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