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이방인

2013. 11. 22. 17:15책이야기

 

 

 

 

    

그때 판사가 일어섰다. 심문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좀 피곤한 표정으로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고 있느냐고만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진정한 후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귀찮음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은 이야기는 그것으로 그치고 더 진전되지 못했다.”

(98-99)

 

주인공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슬픔에 잠겨서 며칠을 보내지도 않았다.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왔고, 장례식 도중에도 소소한 상념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생에 대한 기억이나 자신과의 소중한 추억들로 인한 아프도록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결혼이나 사랑에 대해서도 주인공은 남의 일 대하듯이 했다. 애인이 결혼에 대해서 물어도, 그의 대답은 네가 원한다면 해도 괜찮다는 식의 말뿐이었다.

 

살인? 그가 죽인 사람은 그의 원수도 아니었다. 우연히 알게 된, 그것도 안지 며칠되지도 않은, 그렇다고 그의 인생에 비중있는 인물도 아닌, 그런 사람의 원수를 그가 죽였다. 햇빛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살인한 후에 심문을 받으면서도 주인공은 큰 자책이나 후회가 없다. 판사의 말에 귀찮음을 느낀다고 대답한다.

 

이 사람은 사적인 관심이나 진지한 이야기에는 불편해하지만, 그 모든 관심이 사라지고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한 대화에는 놀라운 흥미를 보이고, 편안해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다시는 나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너는 첫날처럼 흥분한 그를 다시 보지도 못했다. 그 결과 우리들의 대화는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몇몇 질문이 있고, 나의 변호사와 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심문은 끝나는 것이었다. 나의 사건은, 판사 자신의 말에 의하면 착착 진척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대화가 일반적 성질을 띠게 되면, 나도 거기에 한몫 끼곤 했다. 나는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악의를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규모 있고 수수하게 꾸며져서, 나는 가족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은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는 것이었다.” 99p.

 

주인공은 슬프거나 안타까운, 혹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그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감방 안에서 발견한 신문 쪼가리에서 읽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면 그렇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한 남자가 고향을 떠나서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큰 재산을 벌어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는 어머니와 누이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내는 가족들을 놀래켜 줄 의도로 아내와 아이는 다른 곳에 재우고, 자기만 어머니의 여관으로 가서 방을 잡는다. 그러면서 사내는 돈뭉치를 슬쩍 보여주는데, 그날 밤 어머니와 누이는 망치로 때려서 사내를 죽이고, 시체를 강에다 버린다. 그리고 돈을 차지한다. 다음날 그 사내의 아내를 통해서 사내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리고 어머니는 목을 매고, 누이는 우물에 몸을 던진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주인공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상상이 가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내에게도 책임이 좀 있고, 장난이란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재판정에서 재판장은 주인공에게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이유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주인공은 먼저 어머니를 부양할 돈이 없었고, 어머니도 자신도 이미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리고 우리는 각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버렸다고 대답한다.

 

기대의 상실과 새로운 생활방식에의 적응’. 바로 이것이 이방인 가장 첫 문장인 어머니가 죽었다의 실제적인 의미인 것이다. 서로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각자의 생활에 익숙해져버리면, 이미 상대방은 죽은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껍질만 남게 되고, 죽음이라는 것은 늦춰진 순간일 뿐 현존하는 것이 된다.

 

한 가지 이방인에서 가장 강한 대조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과 어머니의 마지막 연인이자 친구였던 노인 토마 페레의 감정이다. 주인공은 법정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무례하게 담배를 피웠으며, 밀크 커피까지 사양하지 않고 마셨고, 시신 앞에서 동료들이 밤샘 하는 도중에 잠을 잤으며,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무덤 앞에서 묵도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머니의 나이를 묻는 장의사의 일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반면에 양로원에서 만난 사이인 토마 페레는 그 장례식 날 자신은 너무 슬퍼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며, 가슴 속의 엄청난 슬픔 때문에 기절까지 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관계와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혈연과 비 혈연,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이 엇갈리고 있다. 눈물이 기대되는 곳에 눈물이 없고, 의미가 있어야 할 곳에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눈물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때 비로소 주인공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느낀다. 살인하고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어머니에 대한 무감각을 지적받는 순간에 느낀다. 그러나 그 느낌도 자기 안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방청객의 분위기라는 외적 조건 때문에 느끼게 된 감정일 뿐이다. 주인공은 철저하게 어머니와 단절되어 있다.

 

그런데 한편 주인공을 당황하게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로맨스는 무슨 의미일까? 까뮈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자기 아들과는 철저하게 단절되었으면서도, 토마 페레라고 하는 낯선 남정네와 황혼에 주고받은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양로원과 노년,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가 이 둘을 맺어 주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단절이 주인공만의 문제일까? 소설 속에서 검사와 변호사는 기존 사회적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주인공을 가운데 두고 논박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인공의 생각이나 느낌은 제쳐두고 자기들만의 논리에 빠져서 그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게 재판을 진행할 따름이다.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피고인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낀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p131.

 

이방인의 첫머리에서 육신의 어머니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다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등장한다. 물론 그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주인공의 참회를 유도하러 찾아온 가톨릭 신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부는 주인공에게 왜 자기를 몽 페르’(mon père. 프랑스어로 신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아버지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에 주인공은 화가 나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한편이라고 대답한다.

 

또 한번의 분열이고 단절이다. 주인공을 몽 피스’(mon fils, 신부가 남성 신도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내 아들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르며 다가오지만, 주인공에게 신부는 몽 페르가 아니라, ‘므시외’(monsieur, 남성을 높여 부르는 말)일 뿐이다.

 

주인공을 찾아온 신부는 앞서의 검사나 변호사와 다를 바 없이 주인공의 영혼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보편타당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주인공이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제시해서 주인공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런 다음에 그에게 자비로운 구원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부도 검사나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존의 틀 안에서 주인공을 이해하고, 그 영역 안으로 주인공을 끌어당기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끝내 주인공의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강한 주인공의 분노와 절규를 이끌어내고야 만다. 무의미한 종교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혈연도 아니면서, 가장 친근한 용어를 갖고 권위를 행사하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갖고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혈연의 단절에 이은, 사회적 단절, 그리고 종교적 단절이 드러난다. 그런 그에게 신이란 아무 의미없는 존재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이 사라지고, 기준이 되는 것들이 부정되고 있다. 주인공의 생각 속에서 모든 것이 재해석되고, 재배치되고 있다. 주인공은 이 소설 속의 누구보다 솔직하다. 어머니의 죽음에 단지 어머니이기 때문에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까뮈는 이 소설 속에서 어머니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서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이 주인공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오직 주인공뿐이다.

 

아마도 주인공은 너무 솔직했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적, 존재적 처지에 너무 솔직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아닌 것을 맞다고 하지도 않고, 연기를 하지도 않으며, 가식도 없다. 그런데 가식과 연기와 기존의 가치에 충실한 사회에서는 주인공의 그런 태도가 못내 기분 나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이방인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사랑을 부르짖고 인간성을 외치며, 그렇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휘두르는 권력만큼 사랑과 인간성을 세상에 채워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가오며, 인류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외치는 진리의 주인처럼 살려고 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모든 권위자들은 실패한다. 주인공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원인을 헤아리지도 못한다. 오히려 힘없고 보잘것없는 자들이 주인공의 일상을 통해서 경험한 그의 인간성을 증언할 뿐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던 예수의 혜안과 관심이 없었다. 기어이 그 여인을, 남편들에게 상처받고, 마을 주민들에게 상처받은, 그 여인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나사렛 예수의 심정이 없었던 것이다.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길영성  (0) 2013.11.22
급진적 기독교  (0) 2013.11.22
자비를 팔다  (0) 2013.11.22
영지주의 복음  (0) 2013.11.22
히틀러의 아이들을 읽다  (0) 201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