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2. 15:13ㆍ책이야기
저자: 수전 캠벨 바톨레티
역자: 손정숙
출판사: 지식의 풍경, 2005.
저자인 수전은 어느 날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바로 전해인 1944년에 출간된 ≪국가≫라고 하는 잡지에 실린 <21세 이하의 나치>라는 글을 보게 된다. 그 글에서 카를 페텔은 “나치가 ‘정치적 적극성을 가진 청년들에게 편승해 권력을 잡았다’”고 쓴다. 수전은 그 글을 읽고 의문에 빠진다. 그렇다면 독일의 젊은이들은 히틀러의 제3제국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그들은 적극적인 가담자들인가 아니면 희생양인가? 그도 아니면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있는가? 그 의문을 풀어나간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책의 내용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 저자는 책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가 인용한 책들의 저자들과 혹은 생존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책의 내용은 생생해졌고, 독자들은 읽어가면서 여러 번 놀라고 한숨을 쉬게 된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히틀러는 “이상”이라고 하는 가장 이상적이면서, 가장 사기치기 쉬운 구호로 젊은이들을 흥분시킨다. “젊은이들이 그 위대한 이상에 복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민족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 끔찍한 선동을 앞세워서 히틀러는 국가적 영웅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까지 오른다. 가톨릭 학교 교실에 십자가 대신 히틀러의 사진이 걸리고, 히틀러에게 기도까지 했다. “아돌프 히틀러, 우리를 새로운 제국으로 인도하소서.”(51p.) 가톨릭의 몬시뇰조차 교실에서 ‘하일 히틀러!’를 먼저 외치고 주기도문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부모보다 히틀러에게 충성했다. 혹시라도 부모들이 히틀러를 비방하면 곧바로 부모들을 고발했다. 그러면 나치는 그 아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나치가 원한 것은 궁극적으로 획일화였다. 독일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은 금지되었다. 음악도 스윙 같은 것은 들으면 안 되었고, 라디오도 독일의 방송만 들어야 했다. 담배와 술도 금지됐고, 여자 아이들은 춤이나 화장도 하면 안 됐다. “나치는 모든 신문과 라디오 방송, 영화, 설교, 학교 수업을 검열했다.”(57p.)
그 획일화는 인간의 양심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이 붙잡혀 갈 때도 독일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 무섭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우며, 때로 도깨비불처럼 나치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알렸던 이들이 있었다. 헬무트 휴베너와 그 친구들, 그리고 그 유명한 백장미단. 그들의 노력은 처참하게 짓밟혔고, 젊은 목숨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져갔지만, 그 시대에 이들이 있었기에 독일은 그 수치를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패전 이후에 아이젠하워는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 독일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임을 깨닫는다. 아이젠하워는 독일의 라디오와 신문 기자들을 불러놓고 자유로운 언론이 되달라고 당부한다. 독일의 정부가 되었든, 점령군이 되었든 자유롭게 비판해달라고 당부한다. 나치의 획일화에서 독일을 구출해야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교사들에 대한 재교육을 실시했다. “학교 교사들은 모든 과목에서 독립적, 비판적 사고를 북돋울 것과 학생들을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로 교육할 것을 지시받았다.”(183p.)
나치는 획일적 사고가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다시는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획일화된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 첩경이 언론의 자유와 독립적, 비판적 사고를 지향하는 교육이었다.
난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 마음이 착잡해져 옴을 느낀다. 어린 시절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초등학교를 배우고,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내가 왜 다시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염려해야 하는지, 이 현실이 가슴 아프고 쓰라려 견딜 수가 없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가 나라의 경제적 파탄과 절망이었다. 독재는 그런 환경에서 힘을 얻는다. 그리고 거짓 이상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더 절망적인 파탄으로 끌고 들어간다. 여기에 교육계와 종교계가 가담을 하고, 기업가들은 박수를 치고, 군인들은 환호를 한다.
결국 독일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하나씩 깨닫게 된다. 연합군은 교육적 차원에서 히틀러의 아이들로 전쟁에 참여했던 아이들에게 고작 열 여섯, 열 일곱 먹은 아이들에게 죽음의 수용소를 보여준다. 직접 본 아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직접 보여주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수용소를 다룬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영화가 과장된 것이라고 거부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영화를 보여준 일이 있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똑같았다. 어떻게 자기 나라 군인들이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총을 발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저 영화는 과장되었다면서 영화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나라 안에서 백주 대낮에 벌어진 일이고, 청문회까지 했던 역사적 사실을 마을 주민들은 전두환의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획일화와 거짓 이상과 선동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본고장이었다. 이곳에서 전당대회도 치르고 히틀러의 생일 행사도 치렀다. 후에 이 뉘른베르크는 다시 한 번 역사에 그 이름을 올린다. 전범 재판이 이곳에서 열렸던 것이다. 나치의 본고장에서 나치를 단죄했다. 이 대목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독일은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독일에는 뉘른베르크가 있다. 우리에게는 어디가 있는가? 이승만이 엎어버린 반민특위, 면죄부 배부로 끝나고만 청문회, 무참히 짓밟힌 촛불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독일에 다시 히틀러를 존경하는 신나치주의자들이 준동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는 짓거리가 볼썽사나워서 그렇지 소수에 그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승만의 아이들, 박정희의 아이들, 전두환의 아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하는 짓거리도 볼썽사납지만, 저들이 아직 이 사회의 주류를 움켜쥐고 있다. 그래서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책이 나오지 않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다시는 독재가 발붙이지 못할 줄로만 알았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제 이 나라가 독재자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자꾸만 하늘에서, 공기 중에서 독재의 냄새가 나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민족이 역사 속에서 더욱 지혜를 배운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