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2014. 7. 29. 22:29성경이야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노래 제목이나 가사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가 그렇다. 이 노래 제목은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부터 사람들이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나, 유명 강사들까지도 이 표현을 즐겨 활용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표현이 마태복음 1616절을 번역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에도 정확하게 들어맞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태복음 1616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이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개역개정 성경이 나오기 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 성경에도 똑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신학교 수업시간에 이 친숙하게 알고 있던 구절이 사실은 원문과 다르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원문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가 아니라 당신은 그리스도시요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순간 드는 생각이 아니 이런 불경스러울 데가 있나?”였다. 예수님보고 당신이라니, 그건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불경이었다. 성경이 불경스럽다니, 교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위아래가 흐릿한 코쟁이 서양 사람들의 영어로 그렇다는 말씀일거야. 그 놈들은 아버지한테도 you라고 한다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교 학부 2학년의 깜냥으로 헬라어 원문을 찾아보았다. σύ()라고 되어 있었다. 헬라어 시간에 쒸, , 쏘이, 쎄 하며 외우던 그 단어가 맞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개역한글 성경 이전의 번역본들을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아서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헬라어 σύ”를 당당하게 당신으로 번역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네 정서가 그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가 그렇다고 해서 σύ”로 번역을 하면 신학적으로 좀 곤란한 점이 생긴다. 신약에서 혹은 주님을 예수님에게 사용하는 경우에,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라, 기독론적인 의미를 갖는 중요한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헬라어 성경인 70인 역(LXX)에서 주님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의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이 칭호를 예수님에게 적용했다고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번역본에서 이 라는 표현을 대신에 선생님혹은 스승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현대인의 성경과 현대어 성경은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표준새번역/새번역 :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가톨릭 성경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동번역/200주년신약성경 :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선생님혹은 스승님이라는 번역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아니라, 외부인들 혹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사용하거나, 마태복음 2618절에서처럼 제자들이 타인에게 예수님의 뜻을 전달할 때 사용된 호칭이다. 제자들은 일관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뜬금없이 제자인 베드로의 입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나온다는 것은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1616절에 나오는 σύ”, 즉 당신은 호칭이 아니다. 그저 인칭 대명사일 뿐이다. 그런데 이걸 주님이나 선생님으로 번역하면 호칭이 주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원문의 인칭대명사가 명사로 바뀌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번역어가 우리네 정서를 담으려는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지만,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주님이라는 번역어보다 훨씬 문제가 많은 번역어인 것이다. 혹자는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그냥 쉽게 생각해서 제자들이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냥 여기에서도 σύ”주님이라고 번역해도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할 수 없어서, “주님이라고 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가능하면 원문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번역의 임무이고 보면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게 더 나을까를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어인 인칭대명사를 빼버리면 어떨까?” 그러니까 당신이라고도 하지 말고, “주님이나 선생님이라고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냥 빼버리자는 것이다. 인칭 대명사를 빼고 문장을 읽어보면 이렇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흔히 영어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주어는 생략해도 아무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생략하는 것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게 우리말의 특징인데, 문맥 속에서 주어가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어에는 아무리 짧은 문장에도 주어가 필요한 반면에, 우리말에는 오히려 문장마다 주어가 들어가면 불편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출발어는 헬라어지만, 도착어인 우리말의 특징을 살려서 번역한다면, 주어를 생략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어가 자연스럽게 문맥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 녹아들어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 게 모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때문이다. 헬라어의 당신을 우리말로 그대로 당신으로 옮기기엔 헬라말과 우리말의 문화적 간극이 너무 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헬라어 σύ”를 곧이곧대로 당신으로 옮겨 놓으면, 무수한 그리고 무시무시한 새로운 해석이 난무할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말의 특성을 살려서 주어를 생략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헬라어의 당신은 너무 멀다.

 

사족: 어느 목사님이 확인해주신 바에 의하면 1887년판 예슈셩교젼셔에서 이 구절을 영생하나님의 아달 키리쓰토라 ᄒᆞ니"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도 주어가 없다. 이미 오래 전에 이 구절을 주어 없이 번역했다는 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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