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7. 22:05ㆍ성경이야기
한나는 어찌보면 그저 한 맺힌 여인으로만 보인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 끝에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한다.
아들을 주시면, 다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다.
일종의 거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기는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하나님은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 하나 얻어서 좋지 않겠느냐는 말로 들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나는 참 지독한 어미로 보인다.
젖 뗀 아들을 어미의 품에서 떼어내서 성막으로 보내는 어미가 보통 독한 어미이겠는가.
자기는 자식 못 낳는 여인이라는 오명을 벗었겠지만, 그 오명을 벗겨준 아들은 온전히 어미에게 이용만 당하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독한 여인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태의 문을 여셨다?
글쎄. 만일 그렇다면 입다가 제 딸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좀 차이는 있지만, 그 속성은 비슷하지 않을까.
성경을 꼭 우리 입맛에 맞게 반듯하고 깔끔하게만 읽겠다는 건 아니지만,
한나의 기도와 신앙, 그리고 사무엘의 탄생을 그렇게 읽는 건 뭔가 아쉬운 부분이 많고,
뭔가 채워지지 않는 빈틈이 너무 커 보인다.
우선 여호와께서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이 못내 눈에 밟힌다.
한나에게 고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이건 뭔가 한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방법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이를 고통 중에 두심으로 하나님의 깊고 깊은 뜻을 알게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사실 고통의 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평안하게 두시지 않았다.
예레미야를 꼬드겨내셔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 없게도 하셨고,
마다하는 기드온을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하셔서 기어코 전쟁터로 내모셨던 전력이 그분에게 있다.
그뿐인가? 자기 아들을 공생애 사역에 투입하기 전에 광야로 내모셨다.
아니, 내쫓으셨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담금질 하셨다.
고통 속에서, 절박한 아픔 속에서 울부짖다보면, 그 고통에 잠겨서 세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의 목을 졸라오는 고통만 보인다.
그런데,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건지, 아니면 그런 종류의 고통이 따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아주 무겁게 입을 닫고 계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정말 어느 순간, 그분의 입 닫고 계심이 모종의 메시지로 들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주변에서는 아, 이제 저 녀석이 하다하다 안 되니까 미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스스로도, 이젠 내가 별 생각이 다 드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남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이, 감히 하나님일 수도 있다.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입 딱 닫고 계신 그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를 넘어 삼천리에 뻗쳐 있는데, 저분이라고 아픈 것이 없을까, 왜 나는 내 생각만, 내 고통만 생각했을까,
라는 오지랖 드넓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보다 엄청 쎈 양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분이, 사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약자였는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래서 그분이 애처로운 것이다. 불경(不敬)스러운 것 같아도, 지극히 성경(聖經)스러운 사실이다.
그래서 이 더러운 세상에서, 나에게 나의 오명과 더러운 운명을 씻어줄 “아들”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에게도 하나님의 오명과 아픔을 씻어줄 괜찮은 “종” 하나쯤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나가 젖 뗀 자기 핏덩이 아들을 엘리 제사장이 주관하고 있던 성소에 던져 넣은 까닭을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때 이스라엘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성소가 있던 실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그리고 한나는 무슨 심정으로 자기 아들을 그 한복판으로 던져 넣었던 것일까.
둘 다 똑같다.
한나가 고통에 겨워서 입을 달싹거리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나,
하나님이 한나의 태의 문을 꽉 붙잡은 채 입을 굳게 닫고 계신 것이 똑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달변가라고 생각하곤 한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 언제든 필요할 때 그 입을 열어 뜻을 밝히시는 분,
이해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당한 욥 앞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내시는 분.
언변으로는 누가 그분을 당하겠는가.
그런데 그분이 지금은 한나의 태의 문만 꽉 붙들고 계실뿐, 말이 없으시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당신의 뜻을 보이실 때, 침묵하셨다.
그분은 자기 아들의 울부짖는 기도에도 침묵하셨다.
그분의 아들 예수님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니,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오죽 간절했을까.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입만 꾹 닫고 계셨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항복을 받아내고야 만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한나에게도,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당신의 뜻을 입을 꾹 닫으신 채 전하고 계신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의 아들이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읽어냈듯이,
한나도 단 한마디도 건네시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읽어낸다.
그래서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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